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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오래된 신들이 섬에 내려오시니 - 괴이학회

by 별나라어린이 2022. 3. 20.

*원래는 제목에 글쓴이를 쓰는데, 여러 작가가 참여한 단편집이라 책을 기획한 단체명으로 썼다. 실제 참여 작가는 전건우, 전혜진, 정명섭, 황모과, 김선민, 사마란

오래된 신들이 섬에 내려오시니 - 괴이학회
*이미지 출처 : 교보문고 홈페이지

 

그 동안 읽기만 하고 감상문 남기고 싶은 책들이 밀렸는데, 이 책을 읽고는 생각보다 큰 실망감에... 그 감상을 잊어버리기 전에 먼저 써본다.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표지의 "코스믹 호러 x 제주설화 엔솔로지" 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도 꽤나 좋아라 하는 러브크래프트식 공포 장르물이, 제주도 설화를 가지고, 국내작가들에 의해 시도되었구나! 라는 기대감이 상당했다. 막 표지만 보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으니,

서점에서 충동적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읽는 내내 실망감에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바로 "코스믹 호러"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스믹 호러가 무엇인가?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아득히 극단적인 공포, 인간이 그 앞에서는 한없이 하찮고 작은 존재로 느껴져서, 그래서 이게 도대체 뭔지도 모르겠고 어찌 해결할 수도 없는 무력감만 남게 되는

그런 압도적인 규모의 공포인 것이다.

 

음 굳이 비슷한 느낌을 떠올리자면..

가볍게는 유럽 여행 갔을 때가 생각나는데,

처음으로 유럽의 아주아주 크고 압도적인 성당을 바로 앞에서 보면 아름다우면서도 살짝 짓눌리는 압박감이 있었다.

혹은... 오스트리아에서 버스를 타고 스위스 쪽으로 향하는데,
창 밖으로 보이는 알프스 산맥이, 정말 너무 커서 아무리 가까이 가도가도 계속 그 자리에 같은 크기로 보이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었다. 자연의 거대한 위용에 압도되면서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시커먼 바닷속 깊은 곳을 쳐다보면 저 보이지도 않는 깊은 곳에 뭔가 엄청난 것이 훅 튀어나올 것 같은 그런 공포? 블루홀 같이 사람의 심해 공포증을 자극하는 그런 느낌?

혹은, 장르적 재미나 결말은 차이가 있겠지만, 영화 딥 임팩트, 2012, 최근의 문 폴 같은 영화에서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대재난을 맞딱뜨릴 때의 아득한 공포감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암튼 굳이 비슷한 느낌을 찾아본다면 개인적으로는 그런 쪽에 가까운 감정들이 '코스믹 호러'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런 류의 이야기에서 작중인물은 보통 압도적인 공포 앞에 무력함을 느낀 나머지 미쳐서 죽어버리거나 정신병원에 갇히거나.. 아니면 그냥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야기가 끝나버리며 여운을 남기는 식이 많다.

시원하게 결론을 내리거나, 어떤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건 그냥 인간의 인지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러브크래프트는 바로 그러한 점을 꾸준히, 절묘하게 묘사함으로써 결국에는 하나의 장르로 분류될만큼의 임팩트를 사람들에게 준 것이고.

 

 

 

그런데,

이 책은 "코스믹 호러"를 표방하였음에도 그러한 공포를 느낄 수 없었다.

아니,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글의 방향들이 조금 잘못되었다고나 할까?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몇몇 단편은
그저 제주도의 사건이나 전설을 활용한 공포 환상소설일 뿐, 코스믹 호러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어려워 보인다.

실린 이야기들의 많은 부분이 사람에 대한 공포, 도시괴담 등을 통해 많이 언급되곤 하는 인간에 의한 사건으로 말미암은 원한, 인간에 대한 공포나 불신이 주제이고, 심지어는 이를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면서 결말을 지어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나름 무게감 있는 주제 가지고.. 작가의 철학도 담고... 인간이 저지른 과오, 원한, 암울한 역사라든가.. 개인이 겪는 사회의 부조리함, 차별, 뭐 이런 교훈도 줄 수 있고 다 좋다 이거다. 근데 정작 이 책의 기획테마에 맞아야 하는게 아닌가 싶은 거다.

 

 

이런게 코스믹 호러인가?

 

 

인간의 인지로 설명이 가능하고 납득된다면, 그건 코스믹 호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코스믹 호러라는 이름으로 장르를 분류한 이유가 바로 "미지에 대한 압도적인 공포"를 근간으로 하기 때문이다.

 

뭐, 몇몇 이야기는 적어도 글의 표현 측면에서라도 코스믹 호러스러운 향기를 느끼게끔 시도를 한다. 사건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멸망으로 다가가는 열린 결말을 보인다거나, 잊혀진 고대의 신을 활용한다든가... 하는 요런 건 분명 코즈믹 호러라는 장르적 특성을 이해하고 표현하려는 시도로 보이긴 한다.

좀 더 폭넓게 찾아본다면, 등장하는 재난의 규모가 크다든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서 자주 보이는 단어나 문체같은 것들을 사용하거나, 자주 보이던 사건이나 생명체들이 등장하는 식의 이야기 전개 등 표면적인 요소 등도 나름 코스믹호러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썼음이 보인다.

 

하지만.... 이게 또 제주도의 전설과 엮었을 때 코스믹 호러스러운 공포를 연출하기에 적절한 분위기와 사건이 쌓여야 하는데 그런게 또 좀 아쉽기도 하고..

 

 

 

만약
코스믹 호러라는 조건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이야기로써 재미있는가? 라고 한다면

몇몇 이야기는 꽤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사마란 작가의 "영등" 이라는 단편이었다.

독자와 주인공의 간극이 있다 해도 충분히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상황 전개/심리 묘사나, 다소 예상되는 결말이라 해도 거기 도달하기까지 차츰차츰 쌓아가는 서술이 능숙하게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정명섭 작가의 "수산진의 비밀"도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정말 그 시대에 있을 법한 꽉 막힌 "선비"가 괴이한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 벌이는 행동은 충분히 결말이 궁금해질 정도로 흥미로웠다.

 

다른 이야기들도,
제주도 전설을 테마로 써낸 공포, 미스테리 단편으로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장르일수록 개인마다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막 하나도 안무섭고 느껴지는 것도 없고 이게 뭐야 하는 그런거 없이 모두 나름의 재미와 흡입력은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애초에 이 책은 "코스믹 호러"라는 테마로 기획된 것이라면서?!

 

근데 안에 실린 내용에서 코스믹 호러스러움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 문제다.
(내가 코스믹 호러를 잘못 이해하고 있나?)

그냥 제주도 전설을 테마로 한 공포 환상소설 뭐 이런 홍보였다면 적절했을 것 같은데, 굳이 코스믹 호러라는 테마를 붙여야 했을까?

이 책을 기획한 괴이학회에서 생각하는 코스믹 호러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작가들에게 주제를 의뢰할 때,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인 공포감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나?
아니면 작가들이 생각하는 코스믹 호러의 코스믹이 결국 인간이나 사회랑 같다고 생각한 것인지....

 

 

읽으면서 아쉽다보니,
자연스럽게 코스믹 호러를 시도한 웹소설 하나가 떠오르며 비교하게 되었는데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라는 소설이다.

감기도령이라는 작가의 웹소설인데, 대놓고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의 세계관, 소재부터 해서 특유의 문체, 묘사, 사건전개를 오마쥬.. 혹은 패러디.. 한편으로는 B급스럽기도 하지만 암튼 열렬하고 적극적인 크툴루 세계관의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코스믹 호러가 주는 특유의 막연하고 압도적인 공포를 꽤 그럴듯하게 묘사한다.

물론 사람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실제로 얼마나 압도적인 공포를 느끼느냐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꾸준히 그런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풍기며 소재와 이야기를 버무리는 작가의 시도는 이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재미를 줄 수밖에 없다.

 

즉, "코스믹 호러"라는 문구로 기획하고 홍보를 한다면 "러브크래프트의 글을 똑같이 따라해!"라는 건 아니지만, 글의 방향성 자체는 이런 쪽으로 초점이 맞춰져야 하지 않나 싶다만

 

이 책에서는 그런게 아쉽다보니 더 비교되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음.. 부정적으로 작성한 내 글에 화가 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니가 얼마나 잘 알길래 코스믹 호러가 맞다 틀리다 평가질인가? 니가 작가만큼 글을 잘 쓰는가? 니가 권위있는 평론가라도 되는가? 등등..

 

하지만, 막무가내로 "이 책 별로야! 재미없어!" 가 아니라,
적어도 "코스믹 호러"라는 테마로 기획된 책이라면..

적어도 내가 알고 좋아하는 코스믹 호러의 특징이 여러 모로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책을 만드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글 자체의 완성도나 깔끔함, 작가의 철학도 좋지만 그 전에 먼저 코스믹 호러라는 본래의 취지에 충실하는 책으로 결과가 나왔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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